2024년 돌아보기 - 망가진 일상을 재건하는 해

2022년 2월부터 영국에 살고 있다. 이제 만으로 3년이 지난 셈이다.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이곳에 와서 8개월 정도 카페에서 일하던 기간이 시즌 1, 부트캠프를 수강하고 영국 회사에 취업해서 Skilled Worker 비자를 받고 생활하는 지금이 시즌2라고 처음에는 생각했는데, 오히려 내가 시즌 2라고 생각했던 기간 중 초반은 시즌 1.5에 가까웠다. 어쩌면 앞으로 영국에 더 오래 눌러앉을지도 모르겠다 OR 한국에 한동안 돌아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게 된 지금이 진짜 시즌 2라는 생각이 들었다.

돌아갈 곳이 있었는데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영국에 그렇게 오래 있을 생각으로 온 것은 아니었다. 한국에서 같이 살다가 이곳에 오며 장거리가 된 파트너가 있었기에 이곳에서의 삶은 일시적인 것이며, 이곳에서 최대한 경험을 다양하게 해보고 영국 회사에서 1년 정도 더 경력을 쌓고 한국으로 이직할 생각이었다. 한국에 돌아가면 좀더 가정에 집중하며 살아야지, 2025년 말 정도면 슬슬 한국에 돌아가야지 생각하던 와중에 이별을 겪게 됐다. 갑자기 한국과의 끈이 뚝 끊긴 느낌이 들었다.

진짜 내 것을 쌓는 시간

한동안은 이별의 아픔에 어쩔 줄 몰라했고, 앞으로 내 삶은 어떻게 되는건지 막막해졌다. 그때 할 수 있는 건 하루하루를 잘 살아가는데 집중하는 것, 관계를 통해 얻어지는 것이 아닌 진짜 내 것을 쌓는 것이었다.

진짜 내 것이라 하면

  • 체력, 건강
  • 다정하고 밝은 태도, 강인한 마음, 회복 탄력성
  • 직업 시장에서의 능력 (Hard Skill, Soft Skill)
  • (파트너와의 뮤츄얼이 아닌) 나만의 인간관계 재구축

정도가 있었다.

(1) 체력, 건강

올해 운동을 정말 많이 했다. 원래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마음이 힘들고 헛헛할 때 운동을 하면 아무 생각이 안 났고, 단순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주 3회 가기도 벅차하던 크로스핏을 하루 2번씩 가기도 하고, 러닝 모임도 시작했다. 처음엔 3km도 겨우 뛰었는데 이제는 5km는 무난하게 뛴다. 올해는 10km 이상 뛰는 게 목표다. 삶의 다른 부분들이 왠지 잘 안 풀리는 것 같을 때에도 운동하는 내가 조금은 멋진 느낌이 들어서 멘탈 관리에 정말 큰 도움이 됐다.

(2) 돈

돈은 사실 줄줄 새고 있다. 렌트(내 경우 월급의 약 40%가 렌트로 나간다)와 전체적인 물가가 비싸서 세이빙은 생각도 못하고 그냥 여기 머무르는 동안 여기서만 할 수 있는 경험을 많이 해 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진짜로 세이빙을 해야겠다는 위기의식이 들었다. 2025년에는 여행도 술도 공연도 많이 줄여야지.

일단 한국과 영국에 비상금통장을 하나씩 만들고 조금씩이나마 채워가며, 약 3개월치 급여 이상은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인터넷은행이 아닌 공식적인 은행 계좌도 하나 개설했다. 행여나 나중에 이곳에서 집을 사고 싶은 생각이 들 수도 있으니까 신용도를 쌓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조만간 신용카드도 개설할 생각이다. 집을 사기 위해서는 목돈이 꽤 필요하다보니 과연 가능할까 싶긴 하지만, 매달 월세로 나가는 돈도 만만치 않아서 계속해서 알아볼 예정이다.

(3) 다정하고 밝은 태도

어두워질 수 있는 상황에도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한동안 '다정'이라는 키워드가 들어간 책을 많이 읽었다. 물론 그것을 실천하는 건 또 다른 일이지만 말이다. 겉도는 듯한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걸어본다거나 인사를 잘 하는 것, 감사를 바로바로 잘 표현하는 것 정도가 지금의 내가 실천하고 있는 것들이다.

생각보다 내가 회복 탄력성이 좋고, 일상을 다시 금방 정상 궤도로 돌려놨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물론 앞으로의 미래가 너무나 불안하고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건 사실 한국에 돌아가도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아이가 없고 내가 직장이 있을 때 이렇게 된 것이 조상신이 도운 일이었을수도 있겠다고 긍정 회로를 돌리고 있다. 나는 삶이 좀 안정화된다 싶으면 그 속에서 왠지 이렇게 머무르면 안 될 것 같다는 불안감을 느껴 자꾸 불안정한 쪽으로 나가려는 성향이 있다. 애초에 나는 결혼이 잘 맞는 사람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나에게 일어난 일들을 받아들이기가 한결 쉬워졌고, 애초부터 내 것이 아닌 것들을 명확히 구분하고 그것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태도를 갖게 됐다.

(4) 직업 시장에서의 능력

회사에는 미안하지만 올해 개인적으로 신경쓸 일들이 많아지면서 일에 집중을 많이 못 했다. 지난 해 퍼포먼스 리뷰 때 개발이나 문서화는 충분히 잘 하고 있으니, 좀 더 회사에서 목소리를 내고 동료들과 지식이나 노하우를 공유하고 이니셔티브를 주도했으면 좋겠다는 피드백을 받았는데, 사실 올해도 비슷한 피드백을 받았다. 많이 걱정한 것에 비해 다른 부분에선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았고 연봉 인상률도 생각보다 높아서 조금 죄송해지기도 했다.

Hard Skill 측면에서는, 2023년에는 Angular를 이용해 Frontend 단 개발만 맡아서 진행했는데 올해는 데이터 파이프라인 쪽 업무도 함께 진행할 수 있었다. 3rd party에서 들어오는 데이터를 분석하고, 요구사항에 맞게 스키마를 짜고, DB에 예쁘게 저장하고 그것을 map에 보여주는 (거의) end-to-end 개발 경험이었다. (아무래도 데이터 엔지니어링에 가까운 업무인 것으로 보인다.)

Redis Cache, AWS Cloudwatch 등 2023년엔 사용해보지 않았던 것들을 사용해보았고 유닛 테스트도 아주 많이 작성했다. 늘 느끼는 거지만 툴 자체는 막상 배우면 그다지 어렵지 않은데, 캐시에 어떤 구조로 데이터를 저장하고 가져올지 정하기, 어떤 정보를 Cloudwatch에서 어떤 빈도로 모니터링할지, 테스트코드는 어떤 상황들까지 커버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부분이 더 어렵다. 이런 부분들은 개발자라면 다들 고민해볼 부분일테니, 올해 직장 동료들과 더 논의해보기 좋은 주제들이 될 것 같다.

올해는
1) 동료들과 더 소통하고
2) 시니어 개발자와 주기적으로 1 on 1을 가지며 그들의 피드백과 노하우를 흡수하고
3) PM이 뭔가 물어보기 전에 늘 먼저 공유하는 습관을 만들어보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작년 초에 한동안 하다가 어느순간 손을 놓아버린
4) 수학 공부 + 알고리즘 공부를 하는 것
또한 목표로 삼았다.

(5) 나만의 인간관계 재구축

내가 1년에 한두 번 한국에 방문하며 지인들을 만날 때, 절반 정도는 파트너 & 나의 뮤츄얼들과 여럿이 함께 만나곤 했다. 그 시간을 정말 좋아했는데, 앞으로는 그렇게 다같이 함께 만나긴 아무래도 힘들 것 같아 아쉽다.

감사하고 신기하게도 올해 영국에서 갑자기 친구들이 생겼다. 이곳에서 생활하던 첫 2년은 여행도 거의 혼자 다니고 약속도 거의 없었는데, 올해 하반기에 몇몇 모임에 나가면서 마음 맞는 친구들을 만나게 됐고 무슨 몇년 알고 지낸 사람들같이 생각보다 더 빠르게 친해졌다.

물론 외국이라는 특성상 이들이 다 영국에 계속해서 머무를지 또 어딘가로 떠나게될지는 모르는 일이다. (나도 마찬가지고) 그렇더라도 이제는 친해지고 싶은 누군가에게 먼저 용기내어 말을 걸어볼 수 있게 됐고, 누군가 다가올 때 무턱대고 선을 긋지도 않는다. 한국에 가서도 보고 싶은 사람들을 따로따로라도 만나볼 수 있도록 용기내어 연락을 할 수 있기를.

해외생활이 로망에서 현실이 되다

영국생활 시즌 2가 이제 시작됐다고 느끼는 이유가 바로 사람들이다. 혼자 이런저런 경험을 하면서 언제라도 돌아갈 사람처럼 살아왔던 지난 2년 6개월과 달리 최근 반 년은 상황만 괜찮다면 여기서 계속 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좀 더 장기적인 모습을 그려보게 됐다.

물론 여전히 상상은 잘 안 된다만, 올해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 또한 살면서 상상조차도 못 해본 일인 건 마찬가지다. 삶은 길다. 대학 졸업하고 독립적으로 산지 이제 10년밖에 안 됐는데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일이 있었는가. 살면서 절대 안 겪을 것 같던 일이 자꾸 일어난다. 앞으로 살아갈 시간은 정말 길고, 그러다보니 또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도 높다. 파도에 몸을 맡기듯 살아가고, 절대적인 건 없다는 걸 기억하면서 살아가기로 했다. 어쩌면 앞으로 내가 머무르는 곳이 꼭 영국은 아닐 수도 있다. 어디로 가서 뭘 경험하고 싶은지 매일 나에게 물어봐 주어야지.

그럼에도 이제는 해외가 나에게 한국보다는 좀 더 '현실'에 가까운 곳이 되었으니, 올해는 opt-out했던 연금도 다시 넣고 ISA도 알아보고 부동산도 호시탐탐 눈여겨보며 여행자 모드가 아닌 일상 모드로 지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