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또] 삶의 지도
내가 보는 나에 대해 글을 쓰는 일은 언제나 참 쑥스럽고 머쓱하기도 하다.
개발자 글쓰기 모임인 '글또'에 지원하는 과정에서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건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는지에 대해 톺아보는 글을 작성하게 됐다. 삶을 대하는 태도와 인생에서의 굵직한 선택들 그리고 고민들에 대해 정리해본다.
1. 태도 : 삶의 모든 순간을 사랑하기
매 순간이 흘러가고 잊혀지는 걸 유독 아쉬워한다. 여름이 끝나는 것, 매 학기의 마지막, 참여했던 활동이 끝나는 순간, 애정을 쏟았던 프로젝트가 끝나는 순간, 졸업, 추억이 쌓였던 집에서 이사를 갈 때... 그 모든 순간 감정적인 동요가 큰 편이다.
어릴 적부터 학년이 바뀌어 반이 바뀔 때마다 이별을 슬퍼했고, 매년 울곤 했다. 그러면서도 막상 새 학년이 시작되면 금방 적응해 언제 그랬냐는 듯 행복해하며 일상으로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어떤 대상에 마음을 주기로 결심하면 (대개 이 대상은 어떤 조직이나 활동이다) 그 순간부터 그것을 많이 사랑하고 깊이 involve 되려고 한다. 어떤 일이든 관계든 언젠가는 끝이 있다는 걸 일찌감치 느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삶을 대하는 태도의 베이스에는 최대한의 마음을 쏟아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하는 것이 늘 깔려 있었다.
그렇게 깊게 마음을 주면서도, 아이러니하게 나는 기억력이 그다지 좋지 않아 지나간 일을 금방 잊어버린다. (흑역사만 잘 기억한다…)
그래서인지 기록에 조금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스무 살 때부터 일기를 써왔고, 지금도 일기를 포함해 사진, 메모 등 어떤 방식으로든 매일의 순간을 기록하려고 한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결국 삶의 원동력이 사랑에 있다는 굳은 믿음에서 나오는 게 아닌가 싶다. 내가 있는 환경, 오늘 만나는 사람들, 지금 하는 일, 그 외 나를 둘러싼 모든 존재들을 사랑하고 최대한 느끼고 기억하려고 애써보는 것. 물론 늘 모든 것을 사랑하며 살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뭔가를 미워하는 데 보내는 시간은 최소화하고 싶다.
쓰다보니 이거 내가 너무 대책없이 금사빠같고 낭만주의적인 인간이 아닌가 싶긴 한데, 그래도 꿋꿋이 이 스탠스를 밀고 나가보려 한다. 이런 태도가 밥벌이에는 그닥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 삶을 행복하고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데는 크게 기여하고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2. 특질 : 색채가 없는 게 고민이던 시절을 거쳐
20대는 내가 색채가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고, 그것이 약간 컴플렉스이기도 했다. 늘 ‘좋은 게 좋은 거다’라는 태도를 가졌고 의견도 취향도 강하지 않았고, 하고 싶은 일이 뚜렷하지도 않았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아 하는 무난한 사람. 이런 나와 달리 어떤 사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이 뚜렷하고, 호불호가 확실하고, 명확한 꿈을 가진 친구들이 주변에 많았고, 나는 그들이 늘 부러웠다.
그나마 특징이라면 약간의 반골 기질이 있어서, 대부분이 선호하는 길을 괜히 좀 피해가고 싶어한다는 것 정도였다. 하고 싶은 것도 무엇도 뚜렷하지 않았던 20대의 나는 나를 잘 알아가고 싶다는 생각에 온갖 전공의 개론 수업을 다 들어보았고, 14년 전부터 mbti를 비롯한 온갖 성격검사를 섭렵하곤 했다. 나를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는 온갖 프로그램을 다 찾아 듣기도 했다.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나는 어떤 사람인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고 여전히 내가 뭘 하고 싶은건지 잘 모르겠다고 느꼈다.
막상 나 자신에 대해 좀 더 알게됐다고 느낀 것은 졸업 후 일을 시작하고 나서였다. 운이 좋게도 첫 직장에서 나는 다양한 일을 경험할 기회를 얻게 됐고(회사가 작아 자연스럽게 올라운더가 돼야 하는 환경이기도 했다), 그러면서 내가 잘 하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삶에서 또 다른 많은 사건들을 겪고, 외국에 나와서 생활을 하면서 나를 조금씩 더 잘 알게 되는 과정 속에 있다. 당시에는 내가 나를 잘 모르는 것 같다고 조바심을 냈지만, 알고보니 나를 이해한다는 건 평생 따라다니는 숙제이자 과정 같은 것이었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 지금 생각해보면 나는 색채가 없는 사람이 아니라 그저 자기 의심이 강한 게 아니었나 싶다. 분명 어떤 부분에 대해서든 내 안에는 조금 덜 선호하는 일과 조금 더 선호하는 일이 있었다. 유독 더 마음이 가는 사회 문제도 있었고, 분야도 있었고, 기호와 취향에 있어서도 분명 호불호가 있었다.
그런데 워낙 내가 좋아하고 관심 간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나보다 훨씬 더 푹 빠져있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니, '이 정도 좋아하는 마음을 갖고 과연 내가 이 일을 좋아한다고 할 수 있나?' 의심하곤 했던 것이다. 나보다 이 일을 더 좋아하는 사람이 그 일을 하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들. 그렇게 자기 검열을 하다가 놓쳐버린 기회가 사실은 많지 않았을까, 지금 생각해보면 아쉬운 마음도 든다.
30대가 된 나는 여전히 이것도 저것도 다 좋아하고, 좋은 게 좋은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확실한 건 20대 때보다 색채라는 게 뚜렷해졌다는 것이다. 확실히 조금은 특이한 선택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기도 하다.
이제는 어떤 일에 대해 자그마한 관심이 생겼을 때, 뭔가 좋고 흥미롭고 궁금하다고 느낄 때 그 시그널을 놓치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보며 나와 잘 맞는 일인지 경험해볼 용기와 추진력이 생긴 것 같다. 지금 경험해보지 않으면 언제 또 기회가 오겠어. 자기 의심을 버리고 나니 조금 더 자연스러워지고, 운신의 폭도 넓어지고. 신기하게도 어느 순간부턴가 색채를 갖고 싶다는 생각 자체가 머릿속에서 사라진 것 같다.
3. 일
자연스럽게 일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나의 첫 직장은 핀테크 스타트업이었다. 대학 졸업을 하던 시기의 나는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잘 몰라 막막했는데, 또 대기업이나 공기업에 가고 싶은 마음은 크지 않아서 스타트업 위주로 알아보곤 했었다.
어느날 대학 커뮤니티에서 대표님이 올린 지극히 스타트업스러운(너! 내 동료가 돼라! 같은 vibe) 구인공고를 보고 홀린듯 커피챗을 신청하게 됐고, 어느새 나는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었고, 5년이라는 꽤 긴 시간동안 함께하게 됐다. 보통 회사에서 5년을 다닌다는 건 흔한 일일 수 있으나... 워낙 입사 퇴사 이직이 잦은 IT 업계에서의 5년은 체감상 한 10년처럼 느껴진 것 같다. 퇴사할 시점의 나는 고인물 중 고인물이었다.
정말 즐겁게 일했다. 야근도 많았고 번아웃도 겪고 힘들기도 했지만 동료들이 정말정말 좋았다. 그야말로 다같이 전우애를 갖고 으쌰으쌰 하는 느낌. 지금도 내가 한국에 방문할 때마다 만나는 사람들의 절반은 전 직장 동료들인 것 같다. 어떻게 이렇게 좋은 사람들이 모였을까 싶을 정도로 좋은 사람들이 참 많았다.
6-7명 정도 규모에서 시작했던 회사가 퇴사할 무렵에는 200명 정도의 규모로 성장했는데, 돌이켜보면 가장 재밌었던 시기는 30~50명 정도 규모일 때였던 것 같다. 그때가 아마 프로덕트가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을 무렵이었을 것이다. 시리즈 A와 B 사이 어딘가의 그 시절은 정말 행복했고 몰입해서 일했다.
냉정하게 돌이켜보면 솔직히 나이브했던 부분들이 정말 많았다. 다들 젊고 의욕 넘쳤지만 커뮤니케이션에 서툴렀던 부분도 많았고, 시행착오도 많았고, 다시 돌아가서 그렇게 하라면 할 수 있을까? 싶을만큼 힘든 시기이기도 했다.
그치만 살면서 앞으로 몇 번 정도는 더 그때처럼 일해보고 싶다. 10년에 한 번씩이라도 그렇게 일에 푹 빠져서 산다면 좋겠다. 그렇게 마음 쏟을 수 있는 조직과 그 안의 좋은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정말 큰 복이다.
4. 진짜 자립 그리고 생존력에 대한 고민
회사는 크게 성장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경력에 대한 고민이나 의심이 끊임없이 있었다. 그때그때 회사에서 필요로 하는 일은 가리지 않고 다 했지만, 하나로 수렴되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어떤 일이든 주어지면 잘 해낼 자신감은 분명히 있고 이런저런 일에 대해 경험치가 쌓인 것도 확실한데, 내가 뭐 하는 사람이고 주특기가 무엇인지 자신있게 얘기하기가 어렵다 느꼈다. 나는 과연 이 회사 밖에서도 잘 쓰일 수 있는 사람일까?
그런 고민을 안고 영국에 왔다. 한국에서의 학벌, 회사 경력, 알고 지내던 사람들, 신용등급(?)처럼 나를 증명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하나씩 쌓아가는 경험을 해보고 싶어서였다. 말이 안통하는 타국에서 일하면서 내 한 몸을 잘 건사할 수 있다면, 어딜 가서든 잘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오기 전에는 적응 못 하고 일도 못 구하고 몇 달 안에 돌아가는 건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생각보다는 잘 살고 있다. 늘 삶은 걱정했던 것보다는 괜찮게 흘러가는 것 같다. 영국에서의 삶을 짧게 표현하자면, 이곳에서 아무런 배경이 없는 나 자신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과정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증명만 하면 예상보다 많은 기회를 얻을 수 있는 환경이기도 한 것 같다.
옛날부터 해 보고 싶던 카페 근무도 할만큼 해 봤고, 개발자로 커리어 전환도 할 수 있었고 취업비자를 받아 이곳에 몇 년은 더 머물 수 있게 됐다. (음...드디어 좀 커리어를 수렴시킬 수 있게 된 걸까? 그건 잘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이 일이 꽤 적성에 잘 맞는 것 같다.)
여전히 생존력에 대한 고민은 현재 진행중이지만, 적어도 이제는 자립을 했다는 느낌이 좀 드는 것 같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많이 사라졌고.
5. Scared? Do it scared
이곳에서 취업준비를 하면서 가장 많이 마음에 새겼던 말이다.
부트캠프를 수강하긴 했지만 개발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다. 첫 직장이 IT 스타트업이었던 만큼 그곳에서 똑똑한 개발자를 수도 없이 많이 봤다. 그냥 똑똑한 게 아니라 똑똑한 덕후들이 정말 많았다. 직업 = 취미 = 특기 = 개발 인 멋진 사람들. 나는 그들만큼 잘 할 자신도 없고 영어도 원어민처럼 하지 못하는데.
아직 개발을 업으로 삼아본 적이 없으니, 막상 입사했는데 막 1주일만에 '너 너무 못한다. 해고!!' 이렇게 될까봐 겁이 나기도 했다. 그토록 면접이 잡히길 바랐으면서도 막상 면접이 잡히면 무서웠다. 내가 잘 못해서 창피하고 민망하고 그럴까봐. 그러면서도 이러다 워홀 비자가 끝날 때까지 잡을 못 구하고 한국에 돌아가게 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달고 살았다.
그치만 면접이 무섭다고 피할 수는 없는 노릇. 무섭다고 피하다보면 진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앞으로 한 발짝도 나가갈 수 없다는 걸 여기 와서 더 크게 느끼게 됐다. 생각해보면 부트캠프 지원하기 전에도 면접이랑 간단한 코딩테스트를 거쳤었는데, 그때도 걱정이 많았고 겁이 많이 났었다. 그쪽 사정으로 면접이 미뤄졌을 때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쉬었던 기억이 난다.
요즘의 화두는 불안을 안고 살아가는 것이다.
나는 언제쯤 좀 안정적인 삶을 살게 될까 싶기도 하지만, 그런 날은 좀처럼 오지 않을 것 같다. 나 자체가 좀 불안을 키우는 성향인 것일지도 모른다. 막상 나는 comfort zone에 들어왔나 싶으면 '내가 이렇게 편안하게 있어도 되나...?' 하고 금방 또 불안해하거든. 뭐 이렇게 살다보면 컴포트 존이 조금씩 늘어나지 않을까?
그저 요즘은 건강한 몸과 건강한 정신, 일하고 싶은 의욕, 일머리와 좋은 태도만 있다면 어디서든 살아지겠지 하고 마음을 좀 편하게 먹어보려 한다. 겁 먹었으면 겁 먹은대로 불안하면 그냥 불안한 대로.